강영우 박사는 중도 실명
한국인 미국 역사상 최고위직

강영우 박사가 자서전에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은 대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와주었던 박원선 선생님이고 그래서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라고 썼는데 교민사회에서는 이 사실이 너무나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국립서울맹학교 교사인 박원선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던 강영우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대학마다 찾아다니며 맹인도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고 한다. 강영우는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후 미국의 명문대학교인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일리노이대학교 교수, 일리노이주 특수교육국장을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에 임명되기도 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년 역사상 최고위직이었다. 그 후 강영우 박사는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루즈벨트재단 고문으로서 장애인의 복지와 권익 향상에 헌신하여 국제로터리 인권상을 받기도 하였다.

교사 박원선의 역할은
모든 학생들의 아버지

1986년 6월 17일 서초구 방배동 낡은 아파트로 퇴근하는 박원선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오늘은 학교에서 보너스가 나오는 날이지만 아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빈 월급봉투뿐이기 때문이다. 막내딸 혜정이가 언제나처럼 아빠를 반긴다. 큰딸 영신과 강수돌 학생은 아직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식점 일을 하는 아내 주경지가 귀가한 것은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박원선은 멋쩍은 듯 빈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수고하셨네요. 봉투 속은 안 봐도 되겠지요…?” 아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빈 월급봉투를 소중한 권리문서라도 되는 것처럼 안방 서랍 안쪽에 넣어두었다. 이미 그 서랍에는 빈 봉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보, 미안해. 당신도 많이 힘들텐데….” 박원선은 월급날이면 늘 하던 말을 또 한다. 몇 푼 되지도 않는 교사 월급이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갖다 주지 못한지 벌써 20여 년이었다. 음식점을 하는 아내는 늘 빈 월급봉투만 가져오는 남편을 타박하지 않았고 갈 데 없다고 데리고 들어온 학생들도 군말 없이 식구로 받아들여 주었다.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는 일이라며 미안해하는 남편 마음을 배려해 주었다. - 소설 같은 이야기 갖지만, 실화입니다. 박원선 선생님은 월급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책 사주고 어떤 학생에게는 1년 치 등록금까지 미리 내주고 집에 데려온 학생에게는 학원 다닐 때 내는 학원비 대주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기죽지 말고 대학 생활 알차고 멋지게 하라고 용돈까지 넉넉히 주는 데 사용했다.

혼자보다는 함께 
나라를 살리는 길

해외 유수 대학과 연구기관들의 경제개발모델을 연구하는 전문가와 사회심리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 비결의 핵심을 한국의 집단지성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인은 평소에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지만 어떤 스위치가 켜지면 집단 모드로 전환되는데 그 속도가 다른 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며 이를 순간적 집단전환 능력이라고 했고 어떤 학자는 이를 한국형 집단지성 시스템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한국인 하나하나는 평소에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위기가 오거나 어떤 신호가 오면 집단으로 전환하여 우리가 된다는 것이다. 학원장학회나 이에 뿌리를 둔 밀알장학회의 장학생들은 비록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모두 이 나라의 동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재들이었다. 학원장학회를 설립한 김익달 사장님이나 그 정신을 이어받은 박원선 선생님 역시 한 사람의 뛰어난 천재보다 여러 사람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같은 꿈을 꿀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원선 선생님이 장학생들에게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장학금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하계 수련회, 동계 수련회를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장학생들과 밀알 회원들을 모아 장학생들 상호 간은 물론이고 선후배 간의 친목과 우의를 돈독히 하여 “혼자보다는 함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