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이민을 와서 낯선 환경에서 때로는 인종차별까지 받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강영우 박사는 교민들의 자부심이며 롤모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국 한인교회 목사들은 강영우 박사 이야기를 설교에 자주 인용하여 교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고 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교회에는 평소보다 두세 배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한인 목사가 강단에 올라 강영우 박사의 생애에 대해 설교한 후, 말미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분이 오셨다며 “강영우 박사의 은사님이신 박원선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그 자리에 있던 교민들은 모두 열렬히 박수를 치며 박원선을 환영했다. 박원선은 교민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박수와 환영이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박원선은 국립 서울맹학교가 교사로서는 첫 부임지였지만 특수교육과정을 이수하거나 그에 관한 전문지식이 전혀 없어 초반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던 것이다. 그저 강영우를 보며 자신이 앤 설리번 같은 교육자가 아니어서 해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어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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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험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박원선은 일주일 공부하고 졸업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었는데, 정산국민학교 6학년 150명 중 7등을 차지하여 담임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서울의 명문 수송국민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하던 실력이니 피난살이에 한 2년 공부와 담쌓았다고 녹슬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1953년 1월 청양군청에서 실시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청양군 전체 1등을 차지하여 학교와 면사무소에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1953년 3월, 17살이 된 박원선은 전교 1등의 성적으로 정산중학교에 들어가 학비를 면제받았고 반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고달프긴 매한가지였다. 오일장을 돌아다니는 큰어머니의 장짐은 여전히 박원선이 지게로 지고 다녀야 했으니 새벽부터 교복 입은 채로 장짐을 지고 인근 장에 가서 좌판을 펴놓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와 학교에 들어갔다. 새벽부터 장짐 지게를 지고 무려 30리 길을 왔다갔다했으니 웬만한 어른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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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고등학생들과 대학교 신입생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대학교 2학년 이상은 성인으로 대우하여 함께 무교동 스탠드바에서 맥주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삼각동의 ‘거상’이라는 고급 한정식집에 가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박원선은 제3기 학원장학생이지만, 중학교 3학년을 건너뛰고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원장학생 제2기와 같이 1958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따라서 박원선은 자연히 김익달과 함께하는 술자리에 당당하게 합류할 수 있었고 술이 취하면 김익달 선사와 어깨동무를 하고 신문로 선사님 댁에 가서 잠을 잔 것도 여러번이었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박원선이 술에 취한 채 밤늦게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김익달 선사님은 아침 일찍 2층으로 새 와이셔츠를 가지고 와서 “옷 갈아입고 얼른 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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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고 그냥 포기하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박원선은 마지막으로 다시 연세대학교를 찾아갔다. 기독교 이념인 사랑과 평등,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목적으로 설립된 연세대학교마저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접수를 거절한다면 장애인은 어떻게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제발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 달라며 담당 교수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박원선의 교사로서의 진심을 안 담당 교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입시 담당 교수회의를 열어 다시 논의하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입학원서를 접수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고맙고 기쁜 마음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입학시험을 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는 점자로 된 시험문제도 없었고 점자로 작성할 수 있는 답안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강영우만을 위해 새로이 점자로 된 문제지를 만들 수도 없었다. 박원선은 담당 교수들과 입시를 치르는 방식을 협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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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선의 걱정은 기우였다. 박상복은 원래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도 좋고 성실해서 공인노무사로서 성공하여 지역의 유지로 대접받고 있었고 세 식구가 살기에 넉넉한 아파트도 장만하였고 부인은 치악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들 박재순은 아홉 살의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장학생 원서도 제출하지 못하고 울면서 돌아갔던 인제중학교 3학년의 어린 박상복이 이제 40대의 가장이고 원주의 공인노무사로서 지역 유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박원선은 이렇게 어눌하지만 순수한 소년 박상복을 알게 해준 동기 신혜자나 친형제처럼 잘 지내주고 도와준 16기 장학생 강수돌, 무의촌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주말마다 시간 내어 기어이 박상복을 찾아 준 김진범,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자신을 믿고 마음을 보태준 아내 주경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유대 경전인 탈무드에는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박원선은 원서 마감일이 지나 장학생 지원서를 들고 찾아온 박상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서 우리 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으로서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자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박원선이 구한 것은 박상복 하나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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